산책이라는 휴식

도처에 넘쳐나는 자극들로 우리 삶은 가득 채워지고 있지요. 나의 뇌 용량을 할당받기 위한 광고와 알고리즘의 치열한 싸움과 그사이를 비집고 증식하는 생각들을 거치다 보면, 하루 끝은 녹초가 되곤 합니다. 그럴 때 저는 가방만 내려놓고 바로 산책을 나가요. 목적 없는 한 걸음을 뗄 때마다 어떤 무거운 것들이 툭툭 떨어집니다. 그렇게 버리고 정돈하면, 끝에는 조금은 정렬된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어요.

이런 산책의 역사는 꽤 오래된 편이에요. 돈을 들이지 않고 장시간 혼자 할 수 있으면서, 효과가 큰 활동은 많지 않았거든요. 항상 '무언가를 해야겠다', '무언가를 하고 싶다'라는 마음으로 달렸던 시기에 그나마 숨 쉬고 살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쉼표가 있었던 덕분인 것 같아요.

1월은 연중 가장 의욕이 넘치고, 그만큼 자신을 몰아붙이기도 쉬운 달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자신만의 쉼을 계속 가져주는 것은 중요해요. 오늘 저의 휴일 산책 루트를 구경해보고, 계란이만의 루트를 한번 만들어보는 건 어떨까요?

  

🕙오전 10:00~11:30

― 루트: 동네를 걸어서, 마트 장보기

갑자기 산책을 말하다 말고 장바구니가 나와서 놀라셨나요? 저의 산책은 고즈넉한 바람뿐만 아니라, 시끌벅적한 마트의 소음과도 함께 합니다. 주로 온라인으로 쇼핑하지만, 가끔은 실물을 보고 싶을 때도 있고 물건 구경하는 재미도 있어서 근처 대형마트를 찾아가곤 해요. 마트에서 보내는 시간이 하염없이 길어지는 것과 과소비를 방지하기 위해, 살 것 목록과 예산을 미리 적어두고 출발합니다.

마트까지 가는 길에는 주말 오전을 충분히 느끼고, 마트에서는 첫 번째 품목에서 마지막 품목에 이르는 경로의 시식과 매대를 슬쩍슬쩍 보면서 걷습니다. 가끔은 운 좋게 사고 싶었던 물건이 할인을 하기도 해요. 대형마트는 마치 어드벤처 같아요. 여기저기서 호객하는 점원들과 유혹하는 상품들, 반지르르한 육류와 생선, 살까 말까 망설이게 하는 간식까지, 매 순간 초보 자취러를 시험합니다. 조금 기가 빨린다 싶은 날에는 빠르게 체크리스트 품목들만 골라서 빠져나올 때도 있죠.

돌아갈 때는 양손이 무겁기 때문에 대중교통수단을 타고 돌아갑니다. 멋지게 사냥에 성공한 사냥꾼처럼 물건들을 차곡차곡 정리하고 점심을 준비하다 보면, 벌써 오전 시간이 끝나버리네요.

🕜오후 1:30 ~ 3:30

― 루트: 도서관 서가 돌아다니기

제 취미 중 하나는 곳곳의 도서관을 구경하는 것인데, 멀리 움직이기 번거로울 땐 동네 도서관을 애용합니다. 사실 대부분 이렇죠. 가장 먼저 신간 코너에 가서 어떤 책들이 요즘 쓰이는지, 이 도서관에는 어떤 신상(!)이 들어왔는지 샅샅이 훑다가 한두 권을 골라요. 그리곤 읽고 싶었던 책을 찾는 척, 000번 대에서 900번 대까지 스리슬쩍 산책하며 책을 추려냅니다. 예전에는 과하게 욕심을 부렸는데 요즘은 3-4권 정도로 타협을 보는 편이에요.

골라둔 책을 들고 자리로 돌아오면, 지금 이 순간의 무드에 맞는 책 한 권을 읽기 시작합니다. 2시간~3시간 정도 읽는 중간중간 일어나서 다시 스트레칭 겸 서가를 어슬렁거리고, 그러다가 또 책 사냥에 성공해서 자리로 돌아오기도 해요. 도서관은 뜻밖의 발견을 가장 쉽고 빠르게 하면서도 가치 있는 만남을 가질 수 있는 곳 같습니다. 이전에 발행했던 독서 특별호🔗에서도 소개해 드렸던 저의 철학자 니체 또한 이런 식으로 찾게 되었지요. 전혀 예상하지도, 원하지도 않았던 만남은 이후의 삶을 많이 바꾸었습니다.

최근 읽고 있는 책은 《가난한 도시생활자의 서울 산책》이에요. 저처럼 산책을 좋아하는 사람의 이야기인가 싶어서 가볍게 빌렸다가 한 챕터 마다 생각하고, 공감하며 진지하게 읽고 있는 중입니다. 서울에 산다는 것은 원주민도, 이주민에게도 참 쉽지 않은 일인 것 같아요.

🕜밤 8:00~9:00

― 루트: 공원 걷기

밤 산책은 산책 중에서도 특별합니다. 타인의 소리를 가려주는 이어폰이나 시야를 차단해주는 모자가 필요하지 않지요. 모두에게 공평하게 내린 어둠이 나에게서, 너에게서 얼굴을 가려버리니까요. 저벅저벅 그저 걷다 보면 복잡했던 생각이 풀리거나, 갑작스러운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합니다. 단상들은 메모를 하기도 하고 잊어버리기도 해요. 이렇게 걷는 것만으로도 집착하지 않는 연습을 하는 것 같아요. 낮에 나를 몰아붙였던 모든 것들로부터, 과거의 저로부터 이어져 온 어떤 동기로부터도 멀리 떨어져서 그저 걸을 뿐입니다.

걷는 행위 자체에 몰두하다 보면 괴로운 생각들은 힘을 잃고 그저 지금 이 시간의 나만 남는 것처럼 느껴져요. 무엇이 그렇게 불안했는지, 괴로웠는지, 위화감이 들었는지, 화가 났는지, 무기력했는지 돌아봅니다. 억지로 하거나 일처럼 하지 않고 걸으면서 떠오르는 순간순간에 대해서요. 그러다 제가 과했거나 덜 했던 것에 대해선 '다음엔 이렇게 해야지' 다짐합니다. 이런 건 잊고 싶지 않아서 산책에서 돌아오자마자 일기에 적어두는 편이에요. 적당히 지친 몸과 개운한 마음과 함께 샤워하고 잠이 들면 그날은 정말 행복한 날이 돼요.

이렇게 온종일 산책한 하루가 끝났습니다. 해야만 하는 활동들로부터 벗어나 그저 신나게, 때론 고요하게 걷는 시간, 끌리지 않으신가요? 겨울 산책은 이 계절만의 멋이 있지요. 감기 걸리지 않게 단단히 차려입고 나가시는 것 잊지 마시고, 성장과 휴식의 리듬으로 물결치는 1월이 되길 바랄게요!

💬 새벽 에디터 코멘트 

고백하건대, 정확히 이 시간표를 따르지 않으나 대체로 이렇다는 말입니다. 쉬는 날은 설렁설렁 움직이고 싶어요.

몰입을 넘어 일에 매몰되다 보면 일상이 무너지기 마련이에요. 일과 일상이 분리될 수 있는 방법을 소개할게요.